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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한국사,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 네번째 결정적 사건.

by 속좁은펭귄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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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던 이유, 정말 볼수록 아쉬워요. 그때 한가지만 잘못됐더라도. 그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거 같은데, 그리고 일본은 그 긴시간동안의 집요함을 엿볼수 있겠더라고요.

 

바로 동학농민운동입니다. 조선의 요청에 청나라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합니다. 

 

 

청과 일본의 개입 소식에 동학 농민군은 자진 해산합니다. 동학농민군 해산 후 1894년 6월 21일 자정, 어두운 밤 완전 무장을 하고 경복궁 주변에 모여든 군사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일본군입니다. 

청나라군 견제를 위해 파병된 일본군의 목적지는 경복궁입니다. 궁에 난입한 일본군이 찾아간 곳은? 바로 고종의 침소입니다. 

 

고종을 찾아간 일본의 속내는?

일본이 청나라에 보낸 문서에서 알 수 있는 속내는?

 

 

우리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방해한 청나라를 물리치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정의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자칭 동양 평화의 수호신.

경복궁을 점거하고 침소를 침입한 이유는 고종에게 강제로 동의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청나라를 공격할 명분이 필요했던 거에요. 명분을 만드는 거죠. 일본의 위혐에 미국과 영국에 도움을 요청한 고종.

그치만 미국과 영국은 조선 정국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하죠. 스스로 힘이 있어야 해요.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 이틀 후 1894년 6월 23일 청일전쟁이 발발합니다. 9개월간에 치열한 전투 끝에 청나라를 제압한 일본. 일본이 이겼으니 그에 맞는 조약을 체결해야죠. 

 

 

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라는 내용이 있죠.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됐다. 그런데 일본이 과연 조선을 위해 저런 조항을 넣었을까?

 

 

 

청나라 대신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엄청 높아진 거죠.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한 일본.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숨통이 트인 뜻밖의 사건은?

1895년 일본이 만주까지 진출하게 되고 

 

 

삼국간섭이 , 요동반도를 일본이소유하는 건 청나라 수도에 대한 위협이고 조선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오동반도를 반환하라고 합니다. 

 

 

 

세 나라의 압력을 받은 일본의 반응은?

결국 요동반도를 반환하고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됩니다. 그렇게 잠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던 조선 조정.

 

삼국간섭 이후 1895년 8월, 조선 조정의 평활르 와장창 깨뜨린 사건은?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다섯 번째 결정적 사건은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광화문 밖에서 울려 퍼진 총성. 경복궁 담을 넘어 침입한 괴한들.

 

 

그들의 목표는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 시해 후 시신을 불태우기까지 합니다. 

 

 

일본은 왜 명성황후를 노렸나?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기세를 단버에 꺾은 러시아, 조선과 러시아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본 일본의 반응은?

' 청나라를 굴복시켰더니 이제는 러시아구나'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명성황후 시해입니다.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한 건 국제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죠. 그래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은폐하려 한 일본.

 

 

그래서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일본이 끌고 간 사람은?

 

 

흥선대원군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계획을 눈치채고 버티기 시작한 흥선대원군, 일본군과 함께 예상보다 늦게 경복궁에 도착합니다. 

 

그때 잔혹한 현장을 지켜본 뜻밖의 목격자는?

그리고 목격자들이 남긴 그날의 진실, 자객들이 달려들자 궁내부 대신들은 왕후를 보호하려고 두 발을 벌려 앞을 막았다.

자객들은 수차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거듭 찔렀다.

 

 

기록을 남겨 사건의 진상을 폭로한 사람들은 서양의 외교관입니다. 

덕분에 세상에 낱낱이 알려진 일본의 만행. 만약 이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다른 역사를 배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의 아내를 죽인 일본의 감시 속에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냈을 고종. 명성황후 사후 4개월 뒤 일본의 감시를 피해 피신하기로 결심한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후 친러파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합니다. 그리곤 친일파 관료들을 체포하라!

고종을 피신시켜 준 대가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받게 됩니다. 외교란 공짜가 없어요.

 

살기 위해 했던 선택이 또 다른 악수가 되버린 상황, 이제는 일본뿐 아니라 청나라, 러시아의 간섭까지 받게 된 상황이죠.

아관파천 1년 여만에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자주국임을 선포한 고종.

아관파천 8년 후 1905년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여섯 번째 결정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을사늑약은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어떠한 국제적 조약도 맺을 수 없다라는 조약이 있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당시 상황은 ?

1905년 11월 17일 황실 도서관 중명전.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중면전을 습격합니다. 그리고 헌병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한 사람, 

 

 

이토 히로부미가 군사를 이끌고 중명전을 쳐들어온 이유는?

 

 

승낙하든 거부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거부하면 뒷일은 우리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고종이 조약을 반대하며 시간을 끌자 군사를 끌고 쳐들어온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강제로 조약을 체결합니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견제해온 러시아와 일본.

 

7. 일본은 어떻게 러시아를 눌렀나?

을사늑약 1년 전 일본이 러시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사건은?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해 아시아 전역에 영향력을 넓히려 한 동양의 신흥국 일본.

일본의 국가 발전 전략은 전쟁입니다.  우리가 잘 살려면 다른 나라를 침략해야 한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발발해 1905년 9월이 종전되었는데 전쟁의 승자는 일본이죠. 일본은 조선에서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맺은 조약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맺은 조약입니다. 

 

 

일본이 서구 열강에게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의 보호권을 인정받은 것. 우리가 대신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의 독립을 지켜줬다며 고종에게 대가로 외교권을 달라고 합니다. 

 

외교권을 빼앗긴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요?

다른 나라와의 모든 교섭 권한을 박탈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 열강들이 세운 세계 질서, 독립국, 속국, 식민지.

독립국이 아니면 침략을 당해도 속수무책이에요. 외교권이 없으면 독립국이 아닌 것.

일본에 외교권을 뺏긴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의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것.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 달고 베를린 올림픽에 나간 것처럼, 그런데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 국기를 달 수도 없었어요. 한국인은 일본의 식민지인일 뿐, 어떠한 권리도 없었던 것. 그런데 손기정은 일본한테 이득이 되니까, 허용했던 거죠.

강제로 을사늑역을 체결했고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그리고 1907년 고종은 강제 퇴위가 됩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진 대한제국.

조선을 식민지화할 일본의 계획이 완성단계에 접어든 거죠.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약 5년의 세월이 지난 1910년 경술년.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대조전의 무거운 침묵 속 순종의 앞에 놓인 문서 하나.

 

 

일본과 조선의 병합은 불가피합니다. 

 

 

이완용의 말에 오랜 침묵 끝에 순종이 내뱉은 말은?

 

 

경술국치가 1910년 8월 29일이에요. 일본의 나라를 빼앗긴 날 승정원 일기에 어떻게 기록했을까?

 

 

조선왕조 518년 역사가 너무나 허무하게 끝난 순간이죠.

 

 

한일병합을 선전하고 기념하기 위해 일본이 만든 것은?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8. 한일병합은 왜 조선에 뒤늦게 알려졌나?

한국사람들에게 한일병합 사실을 일주일 뒤 알린 일본. 왜냐하면 5년 전 을사늑약 때 매우 많은 저항이 있었거든요. 이번에도 저항이 심할테니 미리 막아야겠다. 

한일병합 소식을 알리기 전 한양 거리에 쫙 깔린 헌병과 경찰들, 문제가 될만한 수천 명의 항일 인사들 모두 체포했죠. 그리고 붙잡히고 나서 전해 들은 한일병합 소식, 한일병합 소식이 알려진 한양 거리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나라를 빼앗긴 한국 사람들.

반면 한일병합을 발표했을 때 일본의 풍경은 어땠을까?

 

 

온 나라가 떠들썩한 축하의 분위기에 휩싸인 일본, 쥐 죽은 듯 고요한 한양, 환호로 들끓은 도쿄. 이후 펼쳐질 한일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모습. 조일수호조규에서 경술국치까지 나라를 빼앗기는 데 걸린 시간은 약 40년입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대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목숨이었죠. 우리나라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분열돼서 자초한 측면이 있습니다. 

설령 우리가 자초했더라도 침략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 아픔의 역사를 똑바로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기를 !!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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