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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신병주 교수의 영조의 진실과 거짓, 영조는 정말 경종을 독살했을까?!

by 속좁은펭귄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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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정말 경종을 독살했을까요?

경종이  승하하기 며칠 전 생감과 게장을 먹었고, 그로 인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죠. 여기까지는 실록에 기록된 팩트에요.

영조가 감과 게장을 올렸다? 이건 기록에 없습니다.  경종실록 15권에  따르면 

 

 

경종의 회복을 위해 애쓴 영조.

영조를 의심하는 이유가 경종의 죽음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본 인물이기 때문이에요. 짧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던 황세제 시절을 보내고, 왕이 된 영조가 가장 먼저 처리한 일은?!

오히려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않고 고른 인재 등용 선언을 합니다. 영조가 내세운 정책은? 바로 탕평책입니다. 

 

 

아버지 숙종 때도 당쟁으로 숙청이 계속되었죠. 

 

 

탕평책이라는 합리적 선택을 한 영조, 1727년 탕평 교서를 반포합니다. 

 

 

정치적으로 탕평책을 수립한 후 백성을 위한 정책을 수행합니다. 조선시데 16세부터 60세까지 남성에세 군역의 의무가 주어지는데 영조 때 군역 부담이 최대였어요.

 

 

1년에 군포 2필이 필수죠. 군포 1필에 약 20냥인데  현재 시세가 1냥이면 쌀이 20kg 이에요. 약 5만원이에요. 그럼20냥이면 100만원이죠. 1년에 200만원 납세의무가 있는거죠. 세금은 머릿수에 맞추어 내요. 남자 5명이 있는 집이면 1000만원을 내야합니다. 

양반은 군역의 의무가 없죠. 백골징포는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징수합니다. 황구첨정은 15세 이하 아이에게 징수합니다. 

친족이 대신 내는 족징, 군역의 폐단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보고 이를 매우 안타까워한 영조.

 

 

 

군역때문에 거세하는 일까지 있다고 해요. 군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현장으로 출동합니다. 

 

다른 왕들도 백성을 만났을까?? 왕이 행차해 관찰하는 정도인데 적극적으로 백성과 대화하며 민심을 정책에 반영한 왕은 영조가 유일했죠. 조선판 소통 정치에 여기에 여론조사까지.

반값 군포제인 균역법을 시행합니다. 1년에 군포 1필만, 재정을 위해 다른 세금을 신설합니다. 국고에 타격이 가지 않으면서 백성의 부담을 줄인 제도입니다. 

영조의 균역법은 양반에게 군포 징수는 보류합니다. 조선은 양반 사회죠. 양반의 특권을 없앨 경우 사회 질서가 무너질 것을 우려했죠. 균역법으로 군역의 폐단이 해결됐는지?

 

 

관리들의 부정행위가대폭 감소합니다. 백성의 등을 휘게 만든 군역, 직접 백성과 소통해 균역법을 만들어 민생안정에 힘쓴 성군인 영조. 현장형 임근인 영조,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그림이죠.

 

 

청계천 물길이 빠져나가는 수문이에요. 오간수문교.

 

 

동대문 부근으로 현재 근대식 다리로 복원을 했죠.

청계천 준천 공사 현장으로  물이 잘 흐르도록 수심을 깊게 하는 공사에요. 영조 때 진행한 청계천 준천 공사는 영조가 직접 지휘했다고 해요.

청게천은 태종 때 처음 조성했는데, 수도 방어에는 유리합니다. 

 

 

물이 산을 타고 내려와 홍수에 취약한 한양, 물길이 빠져나갈 수 없는 지형이에요.

청계천을 처음 만든 왕이 태종이에요. 한양의 인구가 늘어나며 쓰레기가 쌓인 청계천, 

 

 

청계천 준천 공사를 실시합니다. 21만 5천여 명의 백성이 동원되고 예산은 약 3만 5천냥에 달하는 대형 공사입니다. 

 

 

청계천 준천 공사가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백성들에게 임금을 지불한고에요. 일자리 창출인 고용효과와 홍수 피해 방지까지.

 

영조는 자기 관리가 몸에 밴 워커홀릭 능력자. 성곤의 모습이죠. 그래서 세자에게도 자신과 같은 모습을 기대하죠.

 

 

부자의 비극, 그 시작.

영조에게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10살 때 사망합니다. 7년후 뒤늦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는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책봉됩니다. 2살 때 세자로 책봉되는데 최연소 세자가 됩니다. 영조는 세자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죠. 생후 100일 때 생모의 품을 떠나 왕세자의 처소로 옮겨져 보모 밑에서 자란 사도세자.

 

 

보모들이 엄마의 역할을 했지만 대체 불가죠. 아들이 아닌 그저 후계자일 뿐, 그래서 2살에 책봉한 거에요. 그리고 세자는 15세때 대리청정을 시작합니다. 영조를 대신해 세자가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합니다. 그러곤 결국엔 영조 마음대로 결정을 하죠.

사도세자가 일을 하면 따로 불러서 혼내는게 아니라, 신하들 앞에서 호통을 쳐요. 욕받이 신세가 된 사도세자,

 

 

일종의 후계자 선행학습이죠. 아들이 마음에 안 든 영조. 영조의 책망과 호통에 사도세자는 점점 더 주구이 들고 부자 관계는 더욱 악화됩니다. 부자 관계가 여러 기록에 남아있는데 

영조의 첫번째 왕비인 정성왕후의 능에 능행을 갔을 때, 

 

 

안 좋은 일은 다 아들 탓, 사도세자는 미칠 노릇이죠. 세자의 사소한 부분까지 지적을 하고 

 

 

세자가 살찌는 것도 못마땅했죠. 급기야 마음의 병을 얻게 된 사도세자.

 

 

그렇게  정신 질환을 얻게 된 세자, 옷을 입는다=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만 보면 혼나니까, 트라우마로 옷만 입으면 발작하는 의대병이 발병합니다. 결국 의복을 불태우기까지 해요. 비단 몇 궤짝을 태울 정도. 결국엔 화살은 옷을 준비한 신하를 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발생한 결정적인 사건. 나경언이 고변서를 통해 사도세자의 비행을 폭로합니다. 

 

 

고변서를 받고 폭발합니다. 세자의 비행을 알리지 않은 신하들에게도 분노를 합니다.  나경언을 처형하고 고변서도 불태웁니다. 그래서 10가지 비행 중 3~4가지만 전해지는 것.

세자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하는 계기가 

 

 

왕손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 은전군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후궁 빙애를 살해합니다.  광증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죠.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버린 사도세자는 분풀이로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아들을 향한 극도의 분노. 그러던 중 누군가 사도세자를 처분하기를 간청하죠.

 

 

영조가 결단을 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

아들을 죽여 달라고 간청하는 어머니 영빈. 

 

 

영조도 명분이 있어야 세자를 처리할 수 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영빈 이씨의 한마디.

아들이 왕실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고, 또한 극에 달한 사도세자의 광증으로부터 세손, 정조를 지키기 위한 선택.

 

 

영빈 이씨의 간청 이후 비극의 시간은 빠르게 다가오고 

 

 

뒤주에 아들을 가두고 직접 못을 박는 영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한 마디.

 

 

왜 뒤주였을까?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큰 공간, 탈출이 불가능한 구조. 영조가 직접 가둘 수 있는 장소죠. 일부 의견에 따르면 뒤주에 가두면  며칠간 생존하잖아요. 영조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거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영조. 뒤주에 갇힌지 8일 만에 사망한 사도세자.

1762년 임오년에 발생한 임오화변, 임오년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은? 바로 임오군란이죠. 

 

 

영조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영조 개인의 성격, 부자의 갈등 등 여러 가지가 작용했겠지만 더 나은 나라를 열망했던 영조. 조선의 미래를 위한 선택으로 악역을 자처해 아들을 죽인 것. 세손에게 힘을 실어주고 안정적인 나라를 불려주기 위해 비극적인 선택을 했을 것.

 

 

다행히 영조의 업적을 잘  계승한 정조, 영조와 정조는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룩합니다. 결국 후세에 성군으로 남은 정조. 완벽한 왕이 되고 싶었던, 영조, 그 때문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조선 역사 가장 큰비극을 남긴, 역설의 성군 영조.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과거가 되풀이되고 있는데, 역사 속 왕을 거울삼아 긍정적인 요소는 계승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줄여나가며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출처: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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