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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역사학자 신주백, 봉오동 청산리는 모두의 전쟁이었다.

by 속좁은펭귄 2020.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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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을미사변, 1910년 한일병탄.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본. 이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들. 일본의 침략을 막기엔 역부족.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째 만주에서 들려온 소식.

한국 독립운동사의 권위자. 한국 근현대사 역사학자 신주백.

임시 정부 분들이 중국식 옷을 입은 이유는?

중국에서 독립운동하기 위해 덥고 습한 상해의 기후에 적응해야함. 중국과 일본의 감시를 피해 현지에 적응해야함.

군복 동시에 노동복임.

1920년 경성에 등장한 모던보이.

1920년에 있었던 독립군의 승리는?

4개월뒤 연이은 청산리 전투의 승리.

1920년에 있었던 역사적 변곡점. 올해는 100주년이 되는 해.

여러분이 아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는?

전투는 군인과 군인의 싸움이죠.

대부분 승패, 장군의 이름만 기억하죠. 교과서에 간단히 요약된 내용들만 있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 역사는 단정하기보다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

시간을 100년 전으로 돌려 왜 봉오동, 청산리에서 누가, 어떻게 싸우고

어떤 영향을 남겼을까! 오늘 준비한 강연 주제는

1988년 서울 올림픽,  1987년 6.10 민주항쟁. 1980년 5.18 민주화운동

1960 4.19혁명 1950 한국전쟁.

1945 광복. 1910~1945 일제강점기. 그리고 100년 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전투가 아닌 전쟁으로 봐야하는 이유.

독립운동가들이 명명한 독립전쟁.

왜 1920년의 전투를 독립전쟁으로 불렀을까.

한해전인 1919년에 일어난 사건은?! 3.1운동이죠.

3.1운동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신분, 직업, 계급, 지역을 초월해 대동단결했던 사건.

독립은 우리 손으로 쟁취한다.!!

항일 독립을 향한 연대 의식을 확인한 3.1운동. 국내 교육열, 만주 애국열.

3.1운동 선구자의 공통점은? 서구식 근대 학교 출신임.

1919년 이후 취학률 3.9%에서 15.3% 로 증가함.

만주 독립군 기지로 몰려든 청년들. 약 60여개의 독립운동 단체 신설.

임시정부 수립.

통합논의를 거쳐 1919년 9월  상해에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

통합 임시정부의 독립전략인 독립전쟁론.

임시정부 노동국총판 안창호 선생이 1920년 1월 1일 신년 연설중 독립전쟁을 발표함.

20년 전에 처음보고 깜놀했다고 함. 왜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걸까.

1년뒤 독립을 가능하게 본 이유는 임시정부가 세계정세를 파악한게 한일병탄후 독립운동가들의 공통된 고민이

독립운동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국가 체제를 바꾸는 프랑스 혁명인가. 무장투쟁으로 이뤄낸 미국 독립전쟁인가.

임시정부의 선택.

미, 일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이런 추측을 촉발시킨 배경이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식 이후 바다를 가진 자가 세계를 쥔다.

빠르고 강력한 배를 만들자. 경쟁적으로 건함을 축조.

미국은 1916년 8척의 주력함을 건조. 1918년 16척 추가 건조를 발표.

일본은 1918년 국가 예산의 30%를 투입한 88함대 건조를 시작.

제1차 세계대전 중 산둥반도에 야욕을 드러낸 일본은

공장도 짓고 군대도 주둔하고 싶다고 세계 회의를 열어 이를 제재한 미국.

일촉즉발의 상황.

1. 미일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2. 독립전쟁으로 방향을 설정.

1920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

이동휘를 중심으로 준비하라.

초기 임시정부의 핵심인물은 이동휘.

독립전쟁의 구심점인 이동휘는 어떤 인물인가요?

1919년 11월 국무총리로 취임함.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대한제국 장교로 개성 평양등지에 학교를 설립.

1919년 연해주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의회를 결성.

이동휘 선생의 독립전쟁론은 무장투쟁의 핵심지역이 만주임.

군대를 지원하는 별도의 민단조직을 운영.

독립전쟁 방법2.

행정과 군대를 분리해 체계적으로 전쟁을 수행.

임시정부의 계획과 체계적 준비 속에 시작된 봉오동 전투.

만주 독립군 소탕에 나선 일본군 정예부대.

일본의 추격을 피해 깊은 산으로 향하는 독립군.

일본군이 다다른 봉오골에는 봉오동의 지형을 활용해 매복해있던 독립군 연합부대가 있었음.

일본군과 맞서 싸워 거둔 독립군의 첫번째 승리.

독립군들이 달려가는 장면은 도망이 아니고 유인하는거에요.

봉오동 핵심 전술은 유인책으로 특정한 곳으로 유인을 함.

팩트에 근접한 묘사라고함.

실제 봉오동은 어디일까요?? 만주투어를 가면 필수코스가 백두산, 청산리 봉오동인데

알려진 봉오동 전투 현장은 실제가 아니라고함.


중국 투먼시 봉오 저수지 근처에 세운 봉오동 전투 기념비가 있는데

실제 전투는 8~10km 거리의 산골임. 봉오동이 만든 오해.

실제 봉오동을 나타내는 글자를 보면

당시 봉오동에 대한 독립군의 회고를 보면

왕천현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가량 떨어진 산간이다. 험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가옥구조도 한국식이어서 마치 국내의 한 지방 같았다- 독립군 이강훈의 일기.

중국속 작은 조선인 마을로 저수지 만들 만큼 수량이 풍부해 농사에 최적합함.

농사짓는 조선인 마을이 이어져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살골짜기는

봉오동 일대를 소유한 조선인은 최씨 3형제임.

당시 만주는 마적 떼 소굴이었는데 마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고 만든 무장대.

3.1운동이후 독립군 부대로 전환.

1. 수백 명이 모일수 있는 공간.

2. 중국, 일본의 감시에서 벗어난 위치.

3. 군사를 뒷받침하는 경제력.

왜 봉오동에서 전투가 벌어졌나요?

봉오동으로 독립군들이 결집하기 시작. 북간도 독립군의 특징이 1920년 1월 이후 독립군 부대 통합을 시도함.

6개 부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

봉오동 전투 바로 직전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춘 독립군.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 핵심기지인 봉오동 상촌.

대한북로독군부 대표 최진동.

1910년 이전 함경도 의병운동을 이끈 홍범도.

1895년부터 포수들을 규합해 의병 활동을 활발히 전개.

사격의 명수임. 머리위에 병을 올려두고 쏘면 100% 명중한다고함.

일본이 두려워했던 비장군. : 날아다니는 홍장군이었다고함.

25년간 게릴라전을 지위한 명장임. 연합부대의 전략전술도 통솔.

봉오동, 청산리 전투후 소련에 정착함. 1921년 부대를 이끌고 소련에 정착한 홍범도 장군.

광복을 2년 앞두고 숨을 거둔 홍범도 장군.

그러나 1989년부터 카자흐스탄의 후손들이 홍범도 거리를 조성.

북한, 중국, 소련, 사회주의 국가= 1980년대까지 닫혀있던 곳이죠.

냉전 해체 후 만주 지역에 대해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면서 알게된거죠.


봉오동 전투의 후원 최씨 3형제.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홍범도 장군.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위패가 봉안된 현충원으로 유해 봉환을 추진중임.

왜 봉오동에서 누가 전투를 이끌었나.

세번째 의문은 봉오동 전투는 어떻게 승리했나.

1920년 초 독립군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

6월 4일 독립군, 함경도 일본군 소대를 습격.

독립군 소탕 부대를 편성해 월강추격대를 만듬.

6월 6일 밤 9시 월강추격대 500여명을 편성해 봉오골을 향해 출발함.

6월 7일 새벽 6시 독립군 정찰대가 발견해 사격함.

봉오동의 전술인 매복 유인.

매복해있던 부대가 일제히 사격함.

6월 7일 오전 11시 독립군의 집중 공격.

봉오골에 매복해 있던 약 1000여명의 독립군. 체계적인 전술과 연합훈련이 만든 승리.


홍범도, 안무, 최진동 등 독립군은 사면을 둘러싸고 포위함. 작전 계획하에 매복하고 공격.

봉오골에서 수차례 훈련과 전술을 수정. 6월 7일 오후 4시 일본군 후퇴 시작.

갑자기 우박과 소나기가 오고 독립군은 시야 확보가 어렵고 일본군에겐 절호의 퇴각기회.

비파동에서 집결했다가 6월9일 복귀함.

후퇴하다 생긴 에피소드가 워낙 급하고 날씨가 안 좋다보니 일본군끼리 오인사격도함.

독립군 작전+ 악천후+ 울창한 숲

독립군은 일본군 추격대신 역랑을 보존하기로함.

사실 명백한 침략이었던 일본.

국제문제로 변질될 우려가 있어요. 일본군이 성급히 복귀를 함.

독립군을 오합지졸로 여겼던 것. 독립군의 실체를 몰랐던 일본.

봉오동 전투후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왜 봉오동 전투를 독립전쟁으로 인식했을까.

1920년 초반 독립군 통합을 통해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

임시정부 중심으로 연합해 얻은 첫번째 승리. 일본 정규군에게 압승을 거둔 첫 전투.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찾게 된 봉오동 전투.

실제 봉오동 전투 피해 규모는?

신주백 소장 판단엔 양쪽 모두 신빙성 없다고함.

임시정부의 보고서는 사격하고나서 4명을 죽였다고하는데 모두 같은사람일수 있음.

증언에 기초한 자료다보니.. 봉오동전투상보를 보면 일본군 기록은 전술 계획이 아닌 책임 회피용 보고서임.

일본 측에도 반박 자료가 없음. 어디에도 신빙성 있는 사료가 없음.

사상자, 피해규모 파악은 군사학적 의미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거둔 독립군의 첫 승리.

정신없이 도망가느라 오인사격. 희생자가 발생한건 팩트임. 근거 없는 논쟁에 빠져 숫자에 매몰되는 건

독립전쟁의 가치를 퇴색 축소.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100주년을 기억하는 방법임.

봉오동 전투 후 독립군의 실체를 파악한 일본은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움.

1920년 9월 일본, 독립군 토벌 작전을 발표함.

독립군과 민간인까지 제거. 독립운동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명분을 만들자.

1920년 9월 중국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중국 마접을 포섭해 훈춘 영사관 습격 사건을 날조함. 이미 텅빈 영사관에 방화를 함.

주권 기관 보호를 핑계로 군대를 파견함.

봉오동 승리후 위기에 처한 독립군.

당시 세계 3위의 군사 강국인 일본. 정면 대결은 100% 불리하죠.

독립군들, 어떻게 대처할지 논쟁. 크게 두 방향이 나옴.

북쪽은 일본군을 피해 역량 보존에 최적임.

익숙한 지형의 백두산. 조국 가까이에서 독립전쟁을 할수 있음.

양쪽으로 흩어져 이동한 독립군.

독립군이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군을 맹추격하기 시작한 일본.

더이상 피할수 없어 시작된 청산리 전투.

청산리가 부른 오해가 역사학자들의 명명이 청산리 일대인데

백두산을 향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6일간 치러진 전투.

청산리 전투 시작은 1920년 10월 21일

우리나라의 10월은? 가을이고 시원하잖아요.

백두산 일대는 이미 한겨울임. 산악 지대에 북쪽이다 보니 이른 겨울에 치러진 전투.

청산리 전투의 특징. 전투 이틀째부터 폭설이 쏟아짐.

보급된 의복은 솜바지 하나뿐이었다.- 청산리 전투 참전 독립군 이우석.

청산리 전투 당시로 알려진 사진.

은빛세계라고하기엔 무성한 풀과 얇은 군복을 입었죠?

확실한건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사진이 아니라는거에요.

청산리 전투에 참전한 독립군의 회고.

독립군 보급품은 감자 5~6알 좁쌀은 6되임. 짚신은 1켤레.

처참한 군복, 식량 무기.

1인당 탄약 보유량은 독립군 약 200발 일본군은 약 240발.

독립군의 보급은 저게 전부임. 일본군은 보급부대가 지원.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과 4번 정면충돌

종일 이어지는 전투에 총알 50발이 전부였던 독립군. 요즘 50발은 1~2분에 다 쏘잖아요.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 탄약 한알도 아껴가며 두려움에 떨었을 독립군들.

의지와 정신력이 만든 기적 같은 승리. 온갖 악조건 속에 쟁취한 값진 승리.

청산리 전투의 승리, 그 비결은?

백두산으로 이동중 벌어진 청산리 전투.

핵심은 역량 보존. 청산리 전투의 핵심 전술.

일본군의 정면 공격에 선회해서 대응함.

우리가 몰랐던 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 격전지는 어랑촌임. 당시의 어랑촌은 교통의 요충지로

어랑촌은 보급로인 동시에 퇴로임.

아침 9시부터 시작된 어랑촌 전투.

월등한 화력과 병력으로 무장한 일본.

완루구 전투를 마친 홍범도 부대가 이를 목격. 뒤에서 후방지원함.

일본군 주력부대 5000명vs 협공한 독립군 2000명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 연합실패.

전술적 차이가 컸던 두 부대. 연합이 결렬됨.

같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자 최정예부대의 협공이 이뤄짐.

서로 각자 알아서 판단하거잖아요. 이것도 일종의 협동으로 판단합니다.

밤에 독립군 부대가 이동한뒤 남아있던 일본군끼리 서로 공격.

이번에도 오인사격을 함.청산리 전투의 전세를 바꾼 두 장군의 협공.

어랑촌 전투 후 승기를 잡은 독립군.

6일째 고동하 전투를 끝으로 이동 독립군은 백두산 이동을 포기함.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북쪽으로 선회함. 북쪽으로 이동한 최진동 부대와 합류.

밀산에서 합류해서 정비 후 러시아로 이동.

1919년 3.1운동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수립.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

무엇이 이런 역사를 가능케 한걸까?

과연 두 장군이 독립전쟁 승리의 주역일까

식량과 군복을 지원한 민초.

식량부터 이불, 군복을 납부. 자발적으로 십시일반.

조선인들은 독립을 위한 전쟁 중.

청산리 전투를 도운 조선인들.

내가 먹으면 누군가는 굶어야 하는 상황임. 부대 전체를 먹일 만큼 넉넉지 않은 식량.

물심양면 도왔던 민초들. 일본군에게는 가짜 정보를 제공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지원. 이름 한줄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인들 때문에 곤란했다는 일본구의 기록이 증명을 해줌.

총은 들지 않았지만 목숨 걸고 싸운 주민들.

독립군의 지원부대를 자처한 사람들 덕분에 청산리 전투 승리라는 기적이 만들어 진 것.

군인들에게 필수적인 무기.

체코군단에게 무기를 구입함. 제1차 세계대전을 보면 답이 보여요.

러시아로 이주한 오스트리아 식민지 체코 사람들을 모아 체코군단이라는 특별부대를 편성함.

러시아쪽 동부전선에서 전투하던 체코군단.

그러나 1917년 러시아, 독일의 휴전으로 싸울 곳 잃은 체코.

그런데 딱 막히게 됨.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기차로 대륙을 횡단한 뒤 이어 바닷길을 통해 프랑스로 합류할 계획을 세움.

5~7만명의 체코군단의 이동. 약 9000km 의 시베리아를 횡단.

1918년 체코군단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제1차 세계대전 끝. 어쨌든 배를 타고 돌아가야 하는데

긴 귀향길에 짐짝 같은 무기. 독립군들에겐 절호의 기회죠.

당시 소총 한 자루의 금액은 약 30~35원.

당시 만주 노동자의 1년 연봉임. 

누군가의 의연금, 누군가는 재산을 기부. 비녀, 은가락지까지 기꺼이 내놓은 사람들.

체코 중고시장에서 조선 장신구가 발견되요. 독립을 바라며 십시일반으로 마련한 무기들.

그런데 독립군에게 전달은 어떻게? 인적이 드문 야간 산길로에서

지방에서 뽑은 농민 200명 경비대원 30명이 길을 떠남.

장총 200여정과 중기관총과 탄환을 한짐씩 졌다.- 북로군정서 독립군 이우석 회고록.

자발적으로 나선 다수의 농민들과 호위하는 독립군.

감시를 피해 릴레이 방식으로 운반.

평지가 아닌 산길을 돌아 눈비를 뚫고 독립군을 무장시킨 사람들.

봉오동 청산리, 수천명의 독립군이 총을 들듯이 각자의 자리에서 걷고, 지고 독립전쟁을 함께한 민초들.

기적에 기적을 더한 사람들.

이름 한자 남지 않은 승리의 진정한 주역인 민초들.

이름없는 민초들의 손에 손을 거쳐 독립군에게 전달된 총과 수류탄. 민초들의 희생이 맺은 결실. 독립전쟁 승리.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아니라 독립전쟁으로 봐야하는 이유에요.

봉오동, 청산리 전투는 임시정부의 계획, 독립군의 연합작전, 민초들의 물심양면이 하나가 되어 달성한 승리임.


영웅들의 신화가 아닌 모두의 역사임.

봉오동, 청산리 전투는 승리의 상징이 된 사건이에요.

봉오동, 청산리 100주년인 해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탁월한 지도자의 리더십. 하지만 역사를 완성하는 것은 민초들의 뜻이 하나로 모였을때 가능한 일이에요.

봉오동, 청산리 승리를 만든 경험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정신적 자양분이 되길.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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